[뉴스] 스페인 왕궁이 다른 나라와 다른 점
작성자 Focus Spain

바르셀로나에서 마드리드로 향했습니다. 물론 두 도시 사이에는 고속열차가 운행되고 있지만, 저는 하루 한 편 운행하는 완행열차를 택했습니다.

점심까지 챙겨 들고 아침 9시에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마드리드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6시였습니다. 그러니 9시간을 기차 안에서 보낸 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기차 안에서, 스페인의 시골 풍경을 나름대로 즐기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마드리드의 숙소는 스페인 왕궁 근처에 있었습니다. 다음날 스페인 왕궁과 근처의 광장을 산책했습니다. 근처에 있던 고풍스러운 건물도, 멀리 보이는 높은 빌딩도 마음에 드는 모습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도시의 풍경을 즐겨 보았습니다.
 

스페인 광장
▲  스페인 광장

 


바르셀로나에서 본 스페인은 무너지고 분열한 제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에게도 아픈 역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죠. 스페인이라는 화려했던 식민 제국의 붕괴는 긴 시간 복잡한 상황을 거쳐 이루어진 사건이었습니다. 

스페인은 16세기 펠리페 2세 치하에서 부흥기를 맞았습니다. 특히 이때 오스만 제국의 해군과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스페인의 입지는 공고화되죠.

스페인 '무적 함대'의 전설이 생긴 것도 이때입니다. 대항해시대를 맞은 스페인은 거대한 신대륙 식민지도 거느리기 시작했습니다. 광대한 남아메리카 서부와 현재의 멕시코, 미국 중서부까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죠. 

하지만 18세기에 접어들며 스페인은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그 신호탄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었죠. 단절된 스페인의 왕위를 두고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이 전쟁을 벌였죠. 스페인을 비롯해 유럽 전역이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결국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루이 14세의 손자인 필립이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5세가 되었죠. 프랑스의 왕가인 부르봉 왕가가 스페인의 왕위까지 장악한 것입니다.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는 프랑스 혁명을 통해 단절되었죠. 하지만 스페인의 보르본 왕가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직 스페인 국왕인 펠리페 6세도 보르본 가문에 속해 있죠.
 

마드리드 전경
▲  마드리드 전경



하지만 왕가가 이어졌다고 해서 스페인의 근대사에 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프랑스에서는 곧 혁명이 벌어졌죠. 나폴레옹은 전 유럽을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페인 역시 1807년 나폴레옹의 침공을 받았습니다.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는 프랑스에 의해 감금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국왕에 앉혔습니다.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페르난도 7세는 5년 만에 왕위를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의 상처는 남아 있었습니다.

통치의 무능과 혼란은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전제적인 성직자와 탐욕스러운 귀족, 시대착오적인 제도만이 스페인의 전부"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죠.

영국을 비롯한 주변국에서 의회의 힘이 성장하고 시민 혁명이 벌어질 때, 스페인은 여전히 낡은 전제군주정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가톨릭 중심의 국가가 되어 종교 재판과 신교도에 대한 차별도 노골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이슬람 세력과 경쟁하며 성장한 스페인이었으니, 종교적 엄숙주의는 더욱 강력했죠.

그 혼란의 사이 스페인 식민지도 하나둘 독립하기 시작했습니다. 남미에서는 시몬 볼리바르나 산 마르틴을 비롯한 독립 영웅이 나타났죠. 19세기 초반까지 대부분의 식민지가 스페인에서 독립했습니다. 넓은 식민지를 경영한 해양 식민 제국도 이제는 그 자리를 영국에 내줘야 했죠.
 

프랑스군의 스페인 점령을 그린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3월 3일>
▲  프랑스군의 스페인 점령을 그린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3월 3일>


19세기 이후에는 정치체제를 두고 격변이 이어집니다. 1873년에는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꾸리기도 했죠. 하지만 공화정도 혼란을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1년 10개월 만에 왕은 다시 돌아왔죠. 1929년에는 군부 독재정권이 세워지고, 1931년에는 군부와 왕가를 몰아내고 다시 또 공화국을 만들었습니다.

가장 큰 비극은 1936년에 벌어졌습니다. 이때 스페인 공화국 총선에서 좌파 연합 세력인 인민전선이 승리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우파 세력은 군부를 동원해 쿠데타를 벌였습니다. 그렇게 3년 간의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은 2차 세계대전의 프롤로그와 같았죠.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세력은 좌파 인민전선 정부를 지지했습니다. 반면 독일과 이탈리아를 비롯한 파시즘 세력은 우파 군부를 지지했습니다. 내전은 국제 사회의 대리전으로 비화되었죠. 나치는 스페인에 공습을 퍼부었습니다. 전쟁의 참상이 스페인을 뒤덮었습니다.
 

마드리드 소피아 미술관에 전시된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  마드리드 소피아 미술관에 전시된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전쟁은 우파 세력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군부 내 권력을 장악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스페인을 지배했습니다. 2차대전 과정에서 프랑코 정권은 명목상으로는 중립을 유지했지만, 실제로는 나치와 협력했습니다. 하지만 나치가 패망한 뒤에도 프랑코는 계속해서 권력을 유지했죠.

2차대전 직후만 해도 서방 세계는 나치와 협력한 프랑코 정부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2차대전이 끝난 뒤에는 냉전과 이념 대립의 시대가 다가왔죠. 그 사이에서 프랑코의 독재와 나치즘 협력은 '사소한' 문제였죠. 냉전 하에서 스페인은 미국이나 서유럽과도 경제적인 교류를 이어나갑니다.

프랑코는 1975년, 82세의 나이로 병사합니다. 프랑코가 미리 지명해 둔 대로 스페인은 다시 왕국이 되었습니다. 1931년 알폰소 13세가 쫓겨난 뒤 44년 만의 왕정 복고였습니다. 알폰소 13세의 손자 후안 카를로스 1세가 국왕이 되었죠.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초기에는 절대군주제로의 회귀를 바라는 듯 보였습니다. 프랑코 정권의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죠. 프랑코가 후안 카를로스 1세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도 그가 프랑코에게 순종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수파를 안심시킨 뒤, 그는 점진적인 개혁에 착수합니다. 다당제를 도입하면서 스페인 내전 이후 오랜 기간 금지되었던 좌파정당의 활동도 허용했죠. 1977년에는 국회의원 총선거가 치러집니다.

1978년에는 전제군주정에 가까웠던 헌법을 바꾸어 스페인을 입헌군주제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1981년에는 개혁에 반발한 보수파의 쿠데타가 있었지만, 국왕은 스페인군의 원수 자격으로 쿠데타 세력을 규탄합니다.

쿠데타는 실패했고, 이제 프랑코 세력은 완전히 기반을 잃게 되었죠. 이듬해 치러진 1982년 총선에서 좌파 정당인 사회노동당이 집권하면서, 스페인의 독재 시대는 완전히 끝을 맺었습니다.
 

스페인 왕궁
▲  스페인 왕궁

 


스페인의 왕궁은 화려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왕궁과는 다른 점도 눈에 띄었습니다. 현재 국왕이 살고 있는 왕궁 치고는 독특하게, 왕궁은 울타리 하나도 없이 광장과 바로 접해 있었습니다.

넓은 마당이나 전망대도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광장에는 평일에도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광장과 왕궁. 이 두 공간이 스페인의 현대사를 상징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페인 국왕은 몇 번이고 복위와 폐위를 반복했습니다. 그 사이 수많은 시민들이 게릴라로, 인민전선으로, 노동조합으로, 금지된 야당으로 모여 저항하고 또 희생되었습니다. 왕궁의 국왕과 광장의 시민들은 때로 한 편에 섰지만, 오랜 기간 반대 편에 서 있었죠.

하지만 결국 왕궁과 광장의 합작으로 스페인은 민주화의 시대를 맞았습니다. 그렇게 보면, 울타리를 치지 않고 광장을 마주보고 있는 왕궁의 모습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습니다.
 

스페인 왕궁
▲  스페인 왕궁

 


후안 카를로스 1세는 한때는 민주화의 영웅이었지만, 초라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부패와 사치, 불륜과 탈세 스캔들이 이어지면서 결국 2014년 자진 퇴위했으니까요. 아들 펠리페 6세가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왕실에 대한 지지도는 예전같지 않습니다.

광장도 왕궁도, 스페인 정치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내전과 독재가 이어지는 사이 빛이 바랜 스페인의 영광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요? 제국이 아닌 민주주의 국가 스페인이 다시 만들어낼 영광은 어떤 모습일까요? 다만 왕궁 앞 여전히 활기찬 스페인의 광장만이, 그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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